가는 길은 꽤나 추웠다. 사무실에 있을 적엔 두껍게 껴입은 옷이 답답할 지경이었지만 잠깐 밖으로 나왔을 뿐인데 오히려 더 껴입지 못한걸 후회하고있다. 인간 참 간사하다.
적당히 어둑어둑한 저녁. 섬짓 돌아본 사무실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실내를 가득 비춘 조명이 여러 창갈래로 새어나와 마치 눈이 여럿달린 괴수를 연상시키게 한다. 굳건한 괴수. 고요한 요새와도 같다.
하얗게 김이올라왔다. 추운바람이 귀를 압박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바람은 귓구멍에 꼽혀있는 밀폐형 이어폰이 소리를 내는지 그냥 귀를 흔들고 있는건지 구분할수 없게 만들었다. 택시가 오랫동안 잡히지 않았다. 퇴근시간 전에 빨리 도착해야 하는데. 오른손에 서류뭉치를 들고 발만 동동 구른다. 사악 한번 더 세게 몰아치는 칼바람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꽤 비싼 돈을 주고산 이어폰을 뜯어내듯 뽑아버린다. 시계가 다섯시 삼십분을 넘기고 있다.
-어서오세요.
어렵사리 잡은 택시의 기사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날씨가 춥죠, 오늘 날씨는 유난히 변덕스럽네요. 비도 왔다 싸릿눈도 내렸다 해도 비췄다.' '구름도 끼었지요.' 적당히 맞장구 쳐주며 흘려들었다.
-이런 날씨일 수록 오히려 택시를 찾는 손님은 많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런 날씨를 불평할 필요는 없을텐데 라고 나는 생각했다.
-네 그렇지요 하지만
이런 날씨엔 버스탈 사람도 그냥 택시를 타자 하는 손님들 덕분에 오후시간대엔 평소보다 손님이 많지만 오히려 제데로 한몫을 잡는 심야 할증요금이 붙는 시간대에 손님이 뚝 끊겨 결국 총 수입은 평소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택시기사는 설명했다.역시 택시기사는 쓸대없이 말이 많은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느 택시기사들 답지 않게 느긋한 편이었다. 더욱이 당장 시간에 쫓겨 사무적 약속처에 가야만 하는 사람이 느끼기엔 더욱 더뎌보였다.
-유난히 나아가질 못하네.
-그러게요, 원래 걸릴 신호가 아닌데,
나는 가만히 앞을 슬적 넘겨보았고 손님의 의중을 어느정도 읽은 기사는 조바심을 내는 시늉을 했다. 여전히 택시는 붉은 신호에 걸려 더이상 나아가질 못했지만 더 이상 기사는 느긋한 잡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지금 퇴근시간 전까지 맞춰 서류를 전달 해야하는 약속처도 그러하고 퇴근전까지 사무실에서 자기 실수를 내가 대신 무사히 잘 마무리 했는지 확인 하기위해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을 상사도 그러하겠지만 그런 공적인 업무말고.
내가 사는 집에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의 연인이다. 아니. 이젠 '사랑하는' 이라는 말보단 '사랑했던' 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진 그이가 나의 연인인 것은 사실이다.
나의 연인은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이 매력적인 여자이다. 높은 굽을 즐겨신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굽의 힐을 신어도 180이 넘는 나보다 머리하나는 작았다. 안으면 품안으로 쏙 들어오는 체격 뿐만 아니라 큼지막한 눈커풀은 워낙 커다란 그녀의 눈을 더욱 커보이게 했다. 시력은 나만치 나빴지만 안경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책을 가까히 하거나 자막이 있는 영화를 볼 적에만 쓰는 얇은 반무테 안경은 그이의 지적인 매력도 돋보이게했다. 약간 노란빛을 띈 얼굴에 가끔씩 손을 가져다 대면 보드라운것이 꼭 아기 피부같았다. 약간 통통해 뒤에서 그녀를 안으면 구름을 껴안듯 포옥 파묻히는 느낌을 좋아했다.
요리에도 뛰어났다. 나보다 퇴근이 늦어지지 않는이상 집에 들어서면 매번 따스한 밥내가 내 식욕을 자극했다. 어느정도 날 이해하기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날 위해 매번 선물을 아끼지 않았다. 나를 사랑해줬다. 하지만.
그녀는 자아가 너무 강했다. 자존심이 강해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금 우리들의 조금 이상한 관계를 너무나도 지극히 객관적이고 현실적이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나와 같이 살고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나와 살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녀의 집에서 얹혀살고있다. 그녀는 능력도 뛰어나다. 아무런 능력도 꿈도 없이 적당히 아웅다웅 하는 나보다 훨씬 잘 나가고있다. 의식하고 있을것이다. 그녀는 똑똑하니까.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계속 사랑하는 마음도 부정할 수 없었다. 강한 자존심 때문인지. 그냥 순수한 사랑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안에서 복잡하게 얽힌 피해의식은 꽤 오래 축적되었다. 나도 충분히 의식했다. 가능하면 그녀와 충돌할 수 있는 부분에선 접어줬다.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비굴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게 내 사랑법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구차했다. 지금 상사의 뒤치다꺼리나 하기 위해 급하게 택시에 몸을 싣고 달려나가는 것 처럼.
-꽤 바쁜일이신가 봐요.
한참을 말없이 운전만 하던 기사가 운을 뗐다.
-위엣분이 조금 실수를 하셔서요. 여섯시까진 도착해야 하는데.
사실 만을 전했다. 하지만 감정은 통한다. 대답은 없었지만 다 알겠다는 듯한 기사의 측은한 눈빛이 전해진다. 이런 눈빛은 익숙하다. 이보다 더한 공격적인 눈빛을 그녀에게도 받았었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해서 마냥 좋을건 또 없어요.
아깐 금세 갈길도 붉은 신호에 막혀 버벅대더니 기사의 손놀림은 호쾌하게 앞선 정지신호를 아슬아슬 비껴간다.
-일처리란 그런거죠 서둘러서 급히 하다보면 오히려 생각치도 못한 부분에서 실수를 하게되요.
-...
-그러면 오히려 빨리빨리 성급해진 꼴이 우습게 될 뿐이죠. 모든 돌다리를 두들겨 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시잉' 기사는 어느세 다시 수다쟁이가 되어있었다. 운전도 여전히 느긋했지만 아까부터 이상하게 청색신호만을 골라 받고있는 듯한 느낌이다. 지금도 방금 아슬아슬하게 청색 신호를 받았다.
-적당히 안정적이면서도 빠르게 가는 속도를 아는 요령은 필요하죠.
기사는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요령이 없었다는 뜻인가.
요령이 없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가장 엊그제 그녀와 벌였던 언쟁을 떠올렸다. 그녀의 일처리는 언제나 항상 과격했다. 자존감이 강한 그녀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선회하는 법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런쪽에 요령있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그래서 조언한 것이다. 요령껏.
하지만 그녀에겐 먹히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도 간섭으로 들릴 정도로 그녀는 완벽하게 꼬여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런 충고를 할 자격도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지 몰랐다. 여느때였다면 애초에 충고도 하지않고 흘려넘겼겠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참을 수 없었다. 매번 무참하게 나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은 이제 한계였다. 그녀가 매번 내게 피해의식을 느끼듯이 나도 내심 그녀에게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충돌했다. 내 요령없는 행동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매번 참아주고 견뎌오는것이 요령이라면 그런 요령따위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너무 빠르게 빠르게 재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멍하니 딴생각 하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사는 여전히 말을 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듯 기사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세 생각을 다 떠들기라도 한것인지 의아한 마음에 기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기사는 웃으며 오른쪽 손을 내밀고 있었다.
-다섯시 오십오분. 거봐요 안늦었죠? 사천 오백원에서 끊겠습니다.
빨리빨리는 안되요 모든지 적당히! 잔돈을 받아들고 뒤돌아볼 세도 없이 청사건물로 내달리는 새에도 기사는 마지막까지 조언을 잊지않았다.
여섯시 정시 퇴근을 기본으로 하는 공무원 청사이기 때문인지 벌써부터 실내는 어두웠다. 기획예산과가 어디더라, 어두침침한 조명아레 서류를 훑어보며 서둘러 걸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 어서와요 윤자가 보낸건가?
생각외로 상대는 그리 깐깐해 보이지 않았다.
-진윤자 주사님 말씀으로 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숨까지 헐떡이는걸 보니 꽤 급하게 온 모양이네? 그렇게 까지 급할 필요 없는 일이었는데.
깐깐해 보이지 않을 뿐더러 느긋하기 까지한 사람이었다. 초조하게 닥달하는 상사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았을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마음고생한게 다 허사가 된 것만 같아 힘이빠졌다.
-오히려 급하면 실수를 하게 된다고. 혹시 내용 잘못 기입한 것은 아니겠지?
기획예산과의 여공무원은 입꼬리를 슬적 올리며 서류를 훑었다. 급하면 실수를 하게된다. 수다쟁이 기사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약간 반항심이 일어났다.
-서두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급하신 일이 아니었다면 저희쪽에서도 좀더 차분하게 처리를 했을 겁니다.
-어라? 그래서 대충 처리해 왔다는 거야?
-그건 물론 아니지만...
여유로운 반박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한다리 건너이긴 하지만 상대와 나의 관계는 엄연히 상하관계이다. 더이상 쓸대없는 말싸움은 좋지 못하다. 나는 신경질적인 마음을 다시 속으로 밀어넣어 참았다. 그게 살아가는 요령이다.
-이봐요 심동욱씨.
그런 내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다시 느긋하게 나를 불러세운다.
-물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적당히 여유를 갖는법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심동욱씨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것 쯤은 이쪽에서도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열심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칭찬에 순전히 기뻐해야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류의 내용도 딱 들어맞고 무엇보다.
상대는 서류쪽으로 잠깐 눈을돌리더니 이내 미소지으며 시계를 가리켰다.
-약속시간도 아직 다 되지 않았고.
다섯시 오십구분 이제 금방 막 여섯시를 찍었다.
-그러니까 이제 딱딱하게 굳어있지 말고 얼굴을 풀어요. 약속시간에 늦어서 꾸중을 듣는다면 그걸로 어쩔 수는 없는 거겠지만 그렇게 팍팍하게 사는것도 영 탐탁치많은 않으니까.
아무런 반박도 할 수없었다. 엉망진창 말도안되는 논리였다. 늦는다면 당연히 혼나겠지만 성급해서는 안된다. 그걸로 어쩔 수 없는 거라니. 지금 참 우스울것 같은 내표정을 앞으로 하고 상대는 여전히 매력적인 미소로 일관했다.
청사 밖은 여전히 추웠다. 아니 더욱 추웠다. 실내있을 때만해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던 겹겹옷을 간사하게도 더욱 여몄다. 어깨의 힘을 빼라. 어쩔 수 없다. 그냥 그런거다. 여자의 말이 떠오른다. 적당히 안정적이면서도 빠르게. 기사의 말도 떠오른다.
심동욱씨의 열심히 하는 모습 바로 같은 직장이 아닌 한 다리 건너서에도 소문이 날 정도로 올곧으니까. 나보다도 더욱 당신을 잘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심동욱씨의 진심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을거라 믿어요.
그녀는 청사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내 뒤로 그렇게 마지막말을 맺었다. 한다리 건너 직장 사람들 보다도, 나와 같은 직장을 갖은 사람들 보다도 더욱 날 잘알고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내 진심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내 머릿속에는 더 이상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추운 옷깃을 여미며 거칠게 내빼버렸던 이어피스를 다시 귀안으로 밀어넣었다. 따듯한 음색이 몸을 녹이는 듯 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편을 기다리며 뒤돌아 청사를 바라보았다. 공무원들의 퇴근시간이 되어 불이 꺼진 청사건물은 더이상 사무실과 같이 고요한 괴물도 거대한 요새같지도 않은 그냥 덩치큰 콘크리트 조각에 불과했다.
잘 알수는 없지만 입가에 웃음이 살며시 지어졌다. 내일도 모래도 나는 계속 내 연인과 다투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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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실제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한 허구입니다.
일기나 수필의 느낌을 갖으며 생각할 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글이 목표였는데 어찌되었는진 모르겠습니다.
그냥 당시 제가 가지고있었던 마음의 불균형 정도나 재자리 할 수 있게끔은 한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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