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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성, 갈로맹광의 숙소.
선이 침구에 누워있다. 몸 구석구석이 붕대로 감겨져있다. 이윽고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다. 숲속에서 구출된 후로 장장 사흘 만에 깨어난 것이다.
“여기가 어디...”
순간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게 되고, 밀려오는 섬뜩함 때문에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아...아파...”
상처투성이인 몸인데다가 갑자기 일어나 몸이 놀란 모양이다. 접질렸던 발목과 온몸에서 통증이 밀려온다. 하지만 통증보다 우선인 건 생사(生死)이기에, 아픔을 참고 주변을 살핀다. 그러다가 단도가 생각나 서둘러 찾는데...
‘없다. 젠장...어디로 갔지? 잃어버렸나...’
이때 갈로맹광이 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온다. 선은 이국적인 갈로맹광의 외모에 놀라 까무러칠 지경이다.
“너...너 뭐야. 괴물이야? 얼굴은 왜 이리 까매? 코는 또 왜 이렇게 크고!”
꽤나 무례한 말이 연이어 튀어나오지만, 갈로맹광의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내가 괴물이면 너는 쥐방울입니다.”
“뭐, 쥐방울? 너 죽고 싶냐?”
“너 여기 안 궁금합니까? 왜 자꾸 이상한 말만 합니까?”
“여...여기가 어딘데?”
“고구려.”
“고구려...라고?”
“맞습니다. 너 고구려 왔습니다.”
‘고구려...란 말이지?’
부모를 버리고 온 나라, 희망을 가지고 온 나라, 죽기를 각오하고 온 나라, 고구려! 마침내 그 고구려에 두발을 내딛은 선의 두 눈에서 불현 듯 눈물이 흘러내린다.
“뭐야...왜 이래...”
선을 바라보는 갈로맹광은 황당할 따름이다. 선이 아예 소리를 내며 대성통곡하자, 더욱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고구가 황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도대체 무얼 어쨌길래 이 아이가 우는 것이오?”
...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오자, 갈로맹광은 더더욱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나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아 진짜 미치겠습니다!”
갑자기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선의 배에서 난 소리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선이 고구와 갈로맹광을 바라보며...
“뭐 먹을 거 없습니까?”
...
선이 허겁지겁 닭백숙을 먹는다. 맨손으로 다리를 뜯어 살코기를 씹어 먹는다. 자신의 식성에 상당히 놀라워하는 고구와 갈로맹광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말이다.
“우리 네 음식 안 뺏어먹습니다. 천천히 먹어도 됩니다.”
“그래,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거라.”
그러나 선은 고구와 갈로맹광이 떠들거나 말거나 허겁지겁 배를 채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은 것이냐? 꽤나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예...뭐...”
한참 먹는데 집중하던 선이 문득 고구를 바라보며...
“혹시...절 구해주신 겁니까?”
“널 업고 여기까지 걸어온 건 여기 있는 감찰관이다.”
선이 갈로맹광을 바라본다. 아까 그 난리를 피웠던 게 생각나 부끄러웠는지...
“뭐...고맙습니다...”
“너, 이름이 뭡니까?”
“선입니다.”
“선? 좋은 이름입니다. 나는 갈로맹광. 여하간 선, 고구려로 왔습니다. 환영합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피부는 까맣고 코는 크고 덩치는 산 같고 말투는 이상하고.’ 그러면서 갈로맹광을 위아래로 훑는데...
“선.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내가 저자에서 파는 물건입니까?”
제법 날 선 갈로맹광의 질문에 선은 당황할 따름이다.
“아...저...그게...”
사실 갈로맹광은 그리 화나지 않았다. 선이 보내온 시선 따위 이미 익숙한지 오래고, 그저 앞으로 그녀가 고구려에서 조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장난을 치는 것이다. 고구려에는 갈로맹광과 같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선. 사과 안합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합니다. 안 하면...”
“안하면 뭐...어쩔 건데요...”
갈로맹광이 선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다.
“아!”
“이리 맞을 겁니다.”
“아씨...”
선이 꿀밤을 맞은 머리를 움켜쥐고 짜증을 낸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갈로맹광은 웃음참기를 하고, 또 그 모습을 본 고구는 연인을 떠나보내고 실로 오랜만에...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
숙군성, 고구의 집무실.
고구와 갈로맹광이 서로를 보고 마주앉아있다.
“태왕한테 상소문을 올려 보냈습니다. 태왕. 기뻐할 겁니다.”
“그러실 테지. 실로 오랜만에 구출된 아이이니 말이오.”
“성주. 선, 태왕한테는 언제 데려가면 됩니까?”
“우선 며칠 간 병사들을 붙여 감시한 다음, 선이 간자가 아니라 고구려인 포로후손이라는 게 확정되면 그때 보내도 늦지 않을 것이오.”
“간자 아닐 겁니다. 내 촉을 믿습니다.”
“이 사람도 그러길 바랄 뿐이오.”
고구려 수도, 평양. 안학궁성 내 편전.
백제와 신라의 영토가 있다. 고구려의 영토는 그것보다 넓다. 대륙의 유연·북위·송나라는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북연이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통틀어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 모든 게 그려져 있는 커다란 지도가 편전에 배치되어 있다.
누구와 손을 잡고 누구를 적으로 삼아야 하며, 적의 요충지를 찾아내어 봉쇄하고, 아군의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지도이기 때문이다. 하여 태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지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회의하는 편전에 상징적인 의미로서, 커다란 지도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태왕인 고거련과 대대로 우중려가 4부의 귀족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다. 명림고보를 비롯한 동부와 아불보구를 위시한 서부는 수장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만큼, 서로 대치중인 것처럼 보이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특히 동부에는 여인이 단 한 명도 없는데, 삼분지 일(1/3)이 여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서부와 철저한 대비를 이룬다.
고거련이 여인들의 출사를 허용했는데 동부에 여인이 단 한 명도 없는 이유는, 강제가 아니라 각부의 수장인 욕살에게 자율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자율권으로 타협을 보았기에 큰 반발 없이, 여인의 출사를 허용하는 것에 대해 합의를 본 것이고 말이다. 그밖에 남부와 북부에서는 오분지 일(1/5)이 여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우중려가 발제한 주제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남방의 백잔(백제)과 신라가 동맹을 맺은 지 어언 수년. 여전히 그 세가 미비하긴 하나, 이제 슬슬 대비책을 간구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먼저 강경한 명림고보가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소. 나라차원에서 백잔으로 향하는 모든 물자를 차단해야 하오. 필요하다면 위나라(북위)와 송나라와의 교류도 막아야 하외다.”
이에 온건한 아불보구가 반발하는데...
“아국에서 백잔으로 향하는 물목은 차단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어찌하여 우리가 위나라와 송나라와의 교류까지 끊어버리게 한다는 것이오.”
“백잔으로 향하는 모든 배들을 차단하면 그 뿐이오. 그것이 설령 위나라와 송나라의 배라 할지라도.”
“위나라와 송나라가 가만히 두고만 보겠소?”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으면 저들이 어찌할 것인데?”
“동부욕살!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무엇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오. 위나라가 북방의 유목국가인 유연과 남방의 송나라를 근방에 두고, 수천리 밖의 고구려를 치는 게 가당하다 생각하시오? 송나라 역시 위나라와 대치중인 상황에서 바다 건너 고구려를 친다는 게 가당하다 생각하시는가?”
“아국이 연나라(북연)를 흡수하게 되면 자연스레 위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는데, 그때 우리가 짊어져야할 외교적 부담은...그대가 늙어서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겁니까?”
“뭐라! 늙어서 생각을 못해?”
명림고보가 발끈하거나 말거나 아불보구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또한 송나라의 경우 백잔과 왜(일본)와 더불어 동맹을 맺고, 우리의 남서방(南西方)바닷길을 봉쇄할 수가 있소이다. 허면 아국의 교역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고, 외교적으로도 고립이 될 수 있음을 동부 욕살께서는 진정 모르시는 겝니까?”
“우리 고구려의 강군으로 해결할 수 있소이다.”
“역시...그 빌어먹을 전쟁 또 말씀 안 하시나 했소이다.”
“뭐 빌어먹을 전쟁?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을 보았나.”
“뭐? 계집? 나이 값 못하는 노인네 주제에 어디서 설쳐?”
동부와 서부 사이에서 고성이 오가자, 우중려가 중재에 나서기 시작한다.
“허면 서부욕살께서는 달리 방도가 있으신 겝니까?”
“백잔과 신라의 사이를 갈라놓으면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중요한 건 방도가 아니겠소?”
“현 신라의 왕 눌지는 대표적인 친 고구려 파 인사이옵니다. 그가 백잔과 동맹을 맺은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고구려와 맞서는 것이라 하나, 실질적인 이유는 위협적인 왜국을 견제하기 위함이옵니다.”
“더욱이 백잔과 왜국은 우호관계에 놓여있으니, 이들 사이를 교묘하게 멀어지게끔 만드는 효과도 있겠고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대로. 허니 아국이 신라에게 문물을 전파하고 왜국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잔과의 동맹 필요성을 못 느끼게 만들면 되옵니다.”
아불보구의 말을 찬찬히 다 들은 우중려가 생각에 잠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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