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창작 웹소설] 선, 고거련에게 달려가다. 12화.

숙군성.

 숙군성주 고구는 전운이 감돌고 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북연의 백랑성이 함락되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북연의 수도 용성으로 가서, 지도층은 물론이요, 고구려인 포로후손들을 위시한 모든 백성들을 데리고 숙군성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오래전 그녀가 자신의 아우인 태왕 고거련으로부터 하달 받은 명령이었으니까. 

 “태왕 폐하. 위나라가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옵니다. 혹 그것까지 염두에 두신 것이옵니까?”

 “맞습니다, 누이. 전쟁도 할 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폐하답지 않은 선택이시라.”

 “위나라 황제가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진 않을 것입니다. 나와 조정에 있는 대신들이 유연과 송나라를 움직일 테니까요.”

 하지만 제정신인 사람도 비이성적인 선택을 통해, 수많은 인명을 해치게 될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고구는 아우인 태왕과 이제는 자신조차 간절히 원하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라도, 북위와 전쟁을 불사할 각오를 하고 그동안 숙군성의 군사들을 엄히 채근해왔던 것이다. 진정한 전쟁억지력은 강군(强軍)에서 나오는 법이니 말이다.

 “충(忠)!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훈련을 시찰하고, 병장기를 손보고, 성곽을 누비며 보초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이때 고구의 시야에 들어오는 병사가 있다. 너무도 앳돼 보이는 병사. 투구가 큰 건지, 얼굴이 작은 건지 모습이 자못 우스꽝스럽다. 고구가 옆에 있는 보좌관에게...

 “투구를 바꿔 주거라.”

 “예, 성주님.”

 이윽고 고구가 병사에게...

 “이름이 무엇이냐?”

 “유라고 하...하옵니다.”

 “나이가 어찌 되느냐.”

 “여...열여섯입니다.”

 ‘열여섯이라...’ 

 고구가 잠시 상념에 잠기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고 다시금 ‘유’라는 병사에게...

 “어디서 왔느냐?”

 “평양에서 왔습니다.”

 “홀로 온 것이냐?”

 “아닙니다. 정혼할 누이와 함께 숙군성으로 왔습니다.”

 “누이? 정혼할 여인이 너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냐?”

 “예! 네 살 많습니다.”

 “그래...헌데 어찌하여 숙군까지 온 것이냐. 여긴 우리 고구려의 국경이거늘.”

 “모...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다?”

 “정혼할 누이와 앞으로 태어날 내 아이, 양가 부모님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목숨을 다 바치겠사옵니다!”

 고구는 병사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또렷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수십 년 전 가슴에 묻은 사내, 자신의 욕심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고구 스스로가 굳게 믿는 사내. 그녀가 정혼하려고 했던 네 살 연하의 꽃다운 사내. 바로 ‘휘’ 말이다.

...

 26년 전. 당시의 고구려의 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은 동부여 정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전부터 부왕인 광개토태왕 함께 정복전쟁을 누볐던 왕녀 고구는 동부여 정벌전쟁에도 최전선에 나가 싸우고 싶었다.

 “나, 고구가 이번에도 너희의 신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 허니 내게 목숨을 바쳐라. 나의 승리에 보탬이 되어라. 알겠느냐?”

 “예! 왕녀마마.”

 고구에게는 친위부대가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십대 중후반이면서, 신분상승의 욕망이 큰 평민계급 출신의 사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드시 승리하여 공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공을 세워 부왕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말이다. 

 “부왕을 뛰어 넘는 정복군주가 되겠다.”

 고구는 맏이였지만 딸이었기에 후계자로서 자연스레 거론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평범한 여인처럼 살 마음도 없었고, 애당초에 평범한 여인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여 정복전쟁에 자진하여 참여했던 것이다. 

 “태왕 폐하. 소신을 믿어주시옵소서. 신 고구.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올 것이옵니다.”

 405년에서 407년까지 이어진 후연과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전부 승리를 거두었던 고구는 마침내 각부 귀족과 대신들로부터 차기태왕 후보의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태왕 폐하를 가장 많이 닮은 분이 왕녀마마시지.”

 “맞소. 둘째 왕자님은 글공부에 몰두하시던데, 학자의 길을 걸어가시면 좋겠소이다.”

 그러나 고구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부왕인 광개토태왕의 의중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후계에 대해 함부로 물을 순 없었다. 태왕이 건재한데 후계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반역의 문제로 붉어질 소지가 크니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도리어 광개토태왕이 먼저, 자신의 후계에 대해 언급을 했다. 

 “짐은 동부여를 정복하고 난 후, 그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자를 내 후계자로 삼을 것이다.”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폐하.”

 광개토태왕은 자신이 전쟁의 화신인 만큼 정복은 기정사실화고, 이후에 민심을 빠르게 수습하는 자식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의중이었던 것이다. 근데 달리 말하면 전쟁에 자질이 있는 고구의 장점을 평가 대상에서 배제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관없어. 그깟 마음. 재물로 환심을 사든, 몽둥이로 패서 얻든. 얻기만 하면 그만이야.”

 진취적인 고구는 태왕의 의중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만 해도 족했다. 부왕의 재가를 받고,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본대보다도 먼저 동부여로 떠났다. 

 ...

 작전은 이러했다.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동부여의 봉화대를 하나하나씩 다 점거하고 나면, 부왕의 본대가 동부여를 전 방위적으로 공격하여 조기에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 이후 고구는 그간 전쟁에서 약탈하거나 모아온 재물을 써 연회를 개최하여, 동부여 백성들의 민심을 얻겠다는 것이었다. 

 모든 건 순리대로 진행되어갔다. 이미 망조가 든 동부여의 보초들은 전근대 시대에 가장 주요한 통신보안수단인 봉화의 경계마저 허술히 했고, 고구는 그 허점을 잘 파고들었다. 새벽, 대낮, 야밤, 오전, 가리지 않고 습격했다. 같은 시간대에만 공격하면 방식이 읽히기 때문. 또한 적의 주검을 땅에 파묻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마침내 단 하나의 봉화만 남은 상황. 고구와 친위대는 예정대로 봉화점령을 위해 산을 오르던 도중, 불운하게도 나무꾼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즉시 그를 사로잡았다. 만일 동부여의 병사였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즉결처분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문제는 아무리 적국의 백성이라 해도 그가 민간인이라는 것이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견해가 엇갈렸다. 민간 백성은 절대 죽이면 안 된다는 측과, 나무꾼이 밑에 내려가서 우리의 위치를 노출시킬지도 모르니 친위대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측으로 말이다. 

 “왕녀 마마는 이번에 동부여 백성들 민심을 얻어야 돼. 저 나무꾼을 죽여서 대관절 어쩌자는 거야?”

 “죽이는 게 맘 편하다니까? 뭣 하러 위험을 감수해?”

 좀처럼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는 가운데, 고구는 문득 자신의 옆에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친위대 중 가장 충성심이 강하며, 자신과 미래를 약속한 네 살 연하의 정혼남, ‘휘’를 말이다.

 “휘야. 너는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제 의중은 확고합니다. 하여 말을 아끼고 있었나이다.”

 “말해 보거라. 너는 어찌하면 좋겠느냐?”

 “응당 죽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응당...죽인다?”

 “그렇사옵니다.”

 “어째서?”

 “왕녀마마를 위해 말이옵니다.”

 “나를 위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하옵니다. 또한 나라를 위해서이기도 하옵니다.”

 ...

  고구가 휘를 처음 봤던 건 1년 전 즈음이었다. 그땐 이런 냉혹한 모습이 아니었다. 출세를 위해 친위대에 자원했다는 호기로운 말과는 달리, 얼굴표정과 목소리 떨림은 어리숙함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었다.

 “어디서 왔느냐?”

 “소...송악(지금의 개성 인근)에서 왔습니다.”

 흰 피부에 허우대만 멀쩡할 뿐 대체로 허약해 보이는 외형. 무엇보다도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전쟁의 최전선을 누빌만한 성정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여 냉정하게...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돌아가거라.”

 “소인을 뽀...뽑지 아니하신다면, 분명 나라가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이옵니다!”

 “뭐라? 너를 뽑지 않으면 큰 후회를 할 것이라고?”

 “소인은 왕녀마마 겨...곁에서, 그 누구도 세우지 못할 공을 세울 거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세우지 못할 공을 세운다?”

 고구는 자질이 전혀 없는 듯 보이는 휘를 들이기가 망설여졌지만...그의 독특한 언행과 비록 쳐진 눈매이지만, 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안광(眼光)이 흥미로웠다. 무언가 딱 떨어지게 형언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결국 고민 끝에 휘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첫 전투 때부터 그를 데려가지는 않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몸을 만들어 놔. 그래야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알겠느냐?” 

 반신반의였다. 인간은 나약하고 노력은 아무나 할 수 없기에, 대체로 타고난 자가 그러지 못한 자를 지배하는 게 세상의 법도라지만...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니 말이었다. 그리고 개선하던 날, 고구는 예외의 존재가 되어 나타난 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거무스름해진 피부와 두터운 다리, 딱 벌어진 어깨, 굵은 팔뚝.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글서글한 눈매에서 느껴지는 선한 인상.

 ‘믿을 수가 없어.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기간 내에 어찌 저리 변할 수가...’

 스무 살의 혈기왕성했던 고구는 순간 휘에게 매혹되었으나,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며 신중을 기했다. 자신이 선택한 사내는 왕가의 일원이 되는 것이고, 장차 자신이 태왕이 된다면 그 사내는 태왕의 배우자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일단 곁에 두고 키워봐야겠어.’

 몸만 만들어졌다고 전쟁에, 그것도 고구처럼 최전방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에 바로 무리 없이 투입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여 고구는 휘를 제대로 교육시켰다. 

 휘는 당연하게도 처음엔 친위대에 동화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처음으로 참여한 전투 때, 숲속에서 은‧엄폐를 제대로 하지 못해 매복 작전에 실패하여 적에게 뒤를 노출시킬 뻔했다. 다행히 적이 우둔하여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정신 안 차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컸다. 그렇다고 기대를 완전히 접을 수도 없었던 고구는 휘를 매섭게 질타했다.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고, 폭언을 함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만일 너 하나가 저지른 실책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죽게 되잖아? 내 반드시 너를 죽이고 네 가족도 찾아내서 죽여 버릴 것이다.”

 물론 실제로 휘의 실수 때문에 친위대 중 누군가가 죽는다 해도, 그의 가족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휘가 빨리 정신 차리길 바랐다. 그가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은커녕, 오히려 태왕이 되는데 일등공신이 되어주길 바랐다. 

 하여 자신이 진짜 차기 태왕이 되면, 실제로 그만한 보상을 하면 될 일이라 여겼다. 각종 재물과 고관의 벼슬은 물론이요, 무엇보다도 태왕이 된 자신과의 혼인이라면 평민계급의 사내에게 그만한 보상은 없으리라 여겼으니까.

 그 다음날 부터였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건 기본이고...

 “병신 같은 자식.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냐?”

실수하면 송구하다는 말 대신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스스로에게 욕을 하며 자책했다. 

 고구는 그 모습이 조금 딱하면서도, 자신이 태왕이 되기 위해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만큼 그가 빨리 성장하길 바랐다. 그래서 더욱 차갑게 대했다. 그가 공을 세우기 전까진 이 긴장 상태를 절대 풀어주지 말기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마침내 다음 전투에서 휘가 공을 세우자, 비로소 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음 전투에서는 심지어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출하고 도리어 적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우자, 개선 연회장에서...

 “휘야.”

 “예...왕녀마마.”

 “난 네가 마음에 든다.”

 “마마...”

 “내 차기 태왕이 되어 너와 중원대륙을 누비고 싶구나.”

 휘는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고구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역대 태왕들이 마음에 드는 여인을 취하듯, 왕녀이자 차기 태왕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 역시, 마음에 드는 사내를 취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 여겼다. 이윽고 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갬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러고는...

 “휘를 장차 제 지아비로 맞이하고 싶사옵니다.”

 고구는 부왕인 광개토태왕의 허락을 구했다. 왕족인 자신과 평민계급의 사내인 휘의  혼인을 말이다. 고구는 거센 반대를 예상했지만 그러나 웬일인지 부친은 연민의 시선을 보내며 수락 했고, 이후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휘는 나의 사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휘의 정서가 점차 그 얘기에 세뇌되어갔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구에 의해 강제로 당한 것이라지만 어쨌든 그녀와 입을 맞추고, 그녀의 정혼자라는 소문이 주변에 퍼져나가면서, 저도 모르게 정서적으로 그녀에게 의존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본인도 고구를 연모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고, 그러면서 그녀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정판이 고구가 무사히 태왕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번 작전이 성공해야 하고, 이를 위해 나무꾼을 죽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작금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