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몇개의 약들과 널부러진 책들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던 것일까, 뜨거워진 방안의 열기에 녹아진 알약은 차갑게 손 주위를 머문다. 벌써 4번째 시도지만 여전히 녀석이 날 현실에 잡아둔다. 무거운 몸을 세워 멍하니 앞을 본다. 널부러진 옷가지들과 몇 장의 지폐들 그리고 누워 있는 술병들.
“삐 삐 삐 삐 -”
스탑워치의 숫자가 2:47 을 스치고 지나간다. 또 똑같은 숫자. 무엇을 위해 죽는 것 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인가. 눈 앞에 있는 진실은 남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비밀.
“제발 꺼져. 날 죽게 내버려둬”
“안돼, 니가 죽기에는 아직 시간이란 녀석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군.”
“그 놈의 시간, 시간 !! 그 녀석은 대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야. 죽겠다고 하는 데도 왜 날 가만 두지 않는 거냐고 !!”
“미안, 넌 아직 속죄가 되지 않았어.”
속죄... 언제 부터였을까 내 머릿 속은 속죄에 대한 생각에만 매달려 있다. 마지막 결론은 항상 세상에 대한 정리로 매듭을 짓는 것이라 치닫지만, 그 이상을 원한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이제 반복되는 일상 만큼이나 가까워진 죽음이라는 목표. 항상 이 녀석이 나를 막지만, 난 죽을 테다. 죽을 테다. 죽어야 한다.
오래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생각을 해보면 난 이미 죽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단지, 난 최선의 죽음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어느 여름 밤 집 근처 아파트 옥상에서 목격한 첫 죽음. 그것은 나에게 방식의 선택을 고민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왜 옥상까지 올라와서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하늘이 바라 보는 곳에서 죽고 싶었어요. 당신은 왜 여기 있죠?”
“저 역시 죽으려 왔답니다. 그런데 당신을 보니 이렇게 죽는 건 별로 인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알아보려고 해요.”
“이래나 저래나 세상은 똑같아요. 단지 일말의 느낌의 차이일 뿐.... 조만간 다시 올라 오게 될꺼예요. 이게 가장 최적인 것을 알게 될테니까요.”
“........”
이유는 없었다. 점점 더 뚱뚱해져가는 내 고민의 구조 속에서 벗어나 자유라는 경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 우연히 보게된 죽음의 장면은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에 대하 차이를 보게 되었고 난 단지 더 나은 죽음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 하게 된 죽음의 목격을 위한 노력으로 나는 죽기를 마음 먹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을 봐라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허리띠에 목을 메달고 죽는 사람, 손목을 그으며 지긋이 미소를 지어보는 사람, 불타는 방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노승, 멀리서 다가오는 열차의 경적 소리에 설레어 하는 사람....
그 어떤 장면도 난 흡족치 않았다. 더욱 사방을 찾아 해매이며 사람들을 찾았고 그 사람들의 죽음을 보며 나의 선택을 고민했다. 그 고민들 사이로 나는 어느새 타인의 죽음의 방관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희열은 어느새 나에게 삶에 대한 즐거움이 되어가고 있었고 나의 죽음은 그렇게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다가온 그 녀석은 나에게 다시끔 죽음이란 단어를 내 가슴 속에 재생 시켰고 또 나를 가로 막으며 속죄란 단어를 되풀이 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날 내버려 둘꺼지? 벌써 4번째란 말이야. 날 내버려둬. 니가 원하는 게 죽음이었고 그렇게 해주겠다는 데, 왜 항상 마지막 순간에 날 흔들어 버리는 거냐고 !!”
“난 단지 니가 비추게 될 마지막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야. 속죄란 것은 너의 죄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야. 모두의 시선을 가지고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진정한 속죄는 너 하나만의 시선을 가지는 것이야. 물론, 아직 넌 너만의 시선을 가지지 못했어.”
“그 시선에 대한 말을 해줘. 그럼 내가 노력 해볼꼐.”
“너만의 시선. 그것은 누군가가 말을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
죽음이란 나에게 쉬운 선택이다. 하지만 완료시키는 것은 나에겐 존재 하지 못한다. 죽음의 실현은 나에게 특별한 조건을 요구한다. 나만의 시선은 무엇인가.
정처없이 길을 걸으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본다. 하나같이 플라스틱 미소를 머금은 채 어딘가로 향해가는 사람들. 그들 중 일부에는 내가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날 옭아 맬 것인가에 고민하던 중 어느 한 노인의 시선이 나를 향함을 느낀다. 그 시선 속에서 이때까지 봐왔던 죽음의 시선이 느껴진다. 왠지 모를 지겨움에 눈길을 피하며 나는 다시 방으로 향한다.
5번째 시도.
어지럽혀진 방을 둘러본 후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다. 아니 어쩌면 저 거울 안에 내가 있는 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또 막을 테지. 하지만 나 역시도 방법이 생각났어. 지켜보라고..”
누운 자리의 사방으로 거울을 설치했다. 거울들이 들여다보는 곳에는 내가 누워 있다. 천천히 옆에 놓인 약을 들고 입으로 향한다. 삼키는 목이 날카로움을 뿜으며 나에게 아찔한 충격을 가져다 준다. 그 탓에 감겨진 눈을 다시 떠 거울을 바라본 순간. 나는 내 어깨 뒤로 비스듬히 걸쳐 앉아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았다.
“그랬군....”
나만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을 가진 나의 죽음. 그 타인의 죽음을 봐라보면서 난 정작 타인이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무심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내 어깨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마주했다.
이로서 난 죽음을 맞이하는 영광을 가진다.
[출처] 환생 - 부끄러운 첫 작문|작성자 차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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