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장이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차량들은 하나 둘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아침 일찍 비가 왔는지 아스팔트는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간간이 창문위로 몇 방울의 비가 찍혔다. 굴곡 없는 잿빛하늘이 깔린 길가엔 행인들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앞으로 길게 줄을 차량 행렬을 따라 가다 벌써 인산인해를 이룬 예식장 주차장을 그냥 지나쳐버리고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주택가 담벼락과 문을 닫은 주말의 상가들 옆으로 겨우 한 자리를 찾아 시동을 끄고 브레이크를 당겼다. 대본 종이와 우산을 챙겨 차에서 내린 그는 골목을 빠져 나왔다.
커피를 파는 노점상인과 정장차림의 하객 무리들이 한데 모여 뿌연 담배연기와 습한 공기가 물안개처럼 예식장 앞에 고여 있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핸드폰 메시지를 열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앞에 도착했어. 준비되면 전화 줘.”
전화를 끊으며 인파를 뚫고 조금 전 나왔던 골목으로 다시 걸어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낮은 주택가 너머로 걸려 있는 예식장을 넘어다봤다. 예비부부와 하객들의 함성은 골목의 정적과 흐린 날씨에 묻혔다.
삼삼오오 대화소리는 바다 심연의 알 수 없는 소음이 되어 귓속을 먹먹하게 했다. 그는 뒷발을 들어 인파들 사이에서 한참이나 찾아, 하객들과 인사하는 친구를 저 멀리서 발견했다. 그리고 틈을 타 다가갔다.
“야, 결혼 축하한다.”
“일찍 왔네, 아 잠시만.”
인호는 옆에 있던 부모님에게 그를 소개했다.
“자네가 이번에 사회를 본다고 했지. 잠시만 따라오게. 주례사님이 잠깐 호흡을 맞춰보자고 하더라고.”
그는 친구에게 말없이 고갯짓을 하고 식장으로 따라 들어갔다. 예식이 한차례 끝나고 사진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사진사의 렌즈가 닿지 않는 테이블에 한 중년이 등을 보이고 단상의 낯선 가족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아는 체를 하자 중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씨름협회장을 하고 있다는 그 중년의 큰 체격과 두툼한 손이 눈에 띄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호쾌하게 보낸 젊은 시절이 묻어 있었고, 그대로 시간이 흘러 인자한 중년의 모습으로 보기 좋게 변한 듯 보였다. 잠시 후 두 사람만이 테이블에 남았다.
“인호 친구라고 했나요? 인호 아버지와는 대학시절 동창이죠. 아무쪼록 실수 한 두 번은 할 수 있으니 잘 마무리 하도록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식이 진행되었다. 강사로서 그에게 마이크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식 경험이 많은지 주례사 또한 제법 담담하게 해냈다. 그렇게 30분의 짧은 예식이 무난하게 끝나고 웃으며 주례사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나누고는 단상으로 내려갔다. 중년의 뒷모습이 식장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발을 옮겼다.
낙엽이 모두 떨어진 인도는 막바지 비릿한 은행향기만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채 수거되지 못한 낙엽들은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대로의 차량들 행진에 다시 합류했다.
정장을 벗어 베란다에 걸어 놓고 벌거벗은 채로 욕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워 오르는 샤워기 물줄기에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이틀 후 떠나게 될 그의 여행이 아직 실감은 나지가 않았다. 물을 잠그고 몸을 말리고는 침대에 몸을 밀어 넣었다. 정적 속에서 시계의 초침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다. 감은 눈두덩 위의 신경이 천천히 박동을 늦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에 들었다.
얇은 커튼위로 어스름이 이미 걸려 있었다. 피곤한 기운에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맡에서 한차례 진동소리가 울렸다. 그는 손을 뻗어 핸드폰의 낯선 번호의 메시지를 열었다.
‘사회를 꽤 잘 보더군요. 나중에 부탁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메시지 남깁니다.’
메시지 마지막은 주례사라고 짤막하게 밝히고는 끝을 맺었다. 뿌둥한 몸을 끌고 내려와 노트북의 전원을 켜며 의자에 앉았다. 얼마 남지 않은 배낭여행. 한 달간 떠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을 자위하며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직업을 만족해왔다. 대학수업은 이미 종강을 한 터라 마땅히 할 거리 없이 일주일간 여행준비를 해왔던 터였다. 이메일 수신함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동행자를 찾는 커뮤니티의 글에서 눈을 떼고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은색 스탠드의 불을 마주하고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입에 커피 한 모금을 흘려 넣었다. 어둠이 들어오는 베란다 창문 틈으로 냉랭한 기운이 비집고 들어왔다. 다시 몸을 추슬러 주방으로 걸어가 스크램블드에그로 적당하게 저녁을 때웠다. 그리고 소파에 다시 누워 TV를 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전화소리가 울렸다.
카페는 두 명의 중년 여인이 차지한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매섭게 불어대는 바깥 날씨와 카페의 모습이 을씨년스러웠다. 바리스타는 묵묵히 머그잔을 닦고, 유난히 높은 카운터 너머로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여성과 그보다는 다소 마른 50대쯤으로 보이는 그들은 귀부인처럼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다. 하지만 낮게 흘러나오는 빌 에반스 트리오의 피아노재즈소리에 묻혀 벙긋거리는 입모양이 마치 고장 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처럼 비현실적으로 비쳤다.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들리지 않는 중년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의 자동문이 열리고 버버리코트를 입은 중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거침없는 발걸음은 그가 살아온 당당한 과거가 반영하고 있었다. 곧장 그가 앉아 있는 자리로 오는데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는 담배를 끄려고 하자 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맡은 편에 앉았다. 전날 예식장에서 만난 근엄하고 인자한 주례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대학교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코트 깃을 한손으로 잡고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담배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중년의 입가에 보기 좋은 웃음이 걸렸다.
“당황스러우셨죠. 말도 없이 메시지를 남긴 거“라고 말하며 시선은 그에게 두고 고개를 돌려 담배연기를 가늘게 뱉어냈다.
“아닙니다. 제가 도움이 될 일이라도.”
그가 말하며 담배를 비벼 껐다.
“우선 커피라도 한 잔씩 하면서 얘기하죠. 뭐, 오늘 급한 스케줄 있거나 그런 건 아닌지요?”
“네, 괜찮습니다, 저는.”
“네 그럼, 우리 사회자님은 그냥 앉아 계시고 제가 주문하고 오도록 하지요. 블랙으로 괜찮죠?”
그렇다고 하자 중년은 자리에 일어나 성큼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그 부탁이란 게……” 잔을 들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는데, 강사님이 사회 보시는 모습이 맘에 들었답니다. 사실 마땅한 사회자가 없던 터라. 사위도 외국인이고해서, 제가 듣기로는 대학교 강사로 계시다고 하더군요.”
중년이 의자에 코트를 벗어서 걸자 풍채 좋은 몸이 가디건 위로 비쳤다.
“우선 말씀은 편하게 하시는 게 제겐 편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러죠. 차차……”
환하게 그에게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식은 내년 2월입니다.”
“그렇군요. 그때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중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미소로 감사의 표현을 그에게 건넸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말없이 각자의 잔에 담긴 커피를 음미했다. 빌 에반스 트리오의 걸 프롬 이파네마의 전주가 시작되었고, 중년 부인이 그때까지 번갈아 입을 열고 있었지만 여전히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훌륭한 학교는 아니지만 저 역시 학교에 있는 입장이라 우리 둘이 어쩜 좋은 친구나 동료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소리 내어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만 일어나볼까요?”
중년의 뒤를 따라 걸으니 키가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세삼 깨달았다. 바깥 공기가 무겁게 얼어 있었다. 중년은 코트의 깃을 세우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강사님 댁은 어디신가요?”
“사월동입니다.”
“그래요? 저도 그 쪽인데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저는 택시를 타면 되니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중년은 문을 열고 벌써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고급세단의 실내는 은은한 라벤더향기가 배어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시장통닭을 한 손에 들고 들어오더라도 그 향기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그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강사님은 아직 싱글이라고……”하고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안 되었으면 합니다. 강사님이 인물도 훤하시고 성격도 서근서근하셔서 제가 너무 혼자서만 멋대로 얘기를 꺼낸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편하게 대해주시는 게 저도 좋죠.”
“하긴 요즘 삼십 대 초반이면 한참이나 즐길 때 아니겠습니까. 제가 가장 후회하는 게 뭔지 아세요.” 라고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허허, 어머니 등살에 못 이겨 맞선을 본 것이지요. 이래나 저래나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이긴 한데, 너무 이르게 결혼한 게 못내 아쉬웠죠.”
중년은 와이퍼를 작동시켜 창문을 한 번 쓸었다. 비가 오나 싶었더니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는 운전을 하는 중년의 옆모습을 가만히 훔쳐다 보았다. 석고상처럼 뚜렷한 골격에 코가 우뚝 솟았다. 거기에 붓은 살집이 푸근함과 강한 인상의 중간을 잇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네 나이가 되면 항상 일탈을 꿈꾸곤 하지요.”
“그런가요?” 그가 대답했다. 그러자 중년이 그를 재빨리 쳐다보고 다시 시선을 거뒀다.
“아무렴요. 직장이나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체면을 차리다가 말년을 맞이하곤 하죠. 난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이렇게 늙어 있더군요. 20년 전 모습이 까마득하긴 합니다. 강사님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초등학교 시절 모습이 지금 떠올려보면 낯선 것처럼 말이죠.”
굳게 닫힌 두꺼운 문이 외부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했고, 스피커에서는 경쾌한 왈츠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추운 날씨로 차량들이 잔뜩 얼어서 굼뜨게 움직였다.
어느덧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 차가 멈췄다.
“바래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3단지에 계셨네요.” 그를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저는 여기 바로 옆에 살고 있었고요. 이웃이었다니.”
“그럼 차라도 한 잔 하시고 가시겠어요.” 그가 말했다.
중년은 보닛의 시계를 한 번 보더니 그러자고 답했다.
현관을 지나 썰렁한 거실로 중년을 안내하며 주방의 커피포트 스위치를 켰다. 중년은 거실을 둘러보며 그가 수집하는 그림을 구경하고 나서, TV 옆에 비스듬히 놓인 액자 앞을 한참이나 서 있었다.
“아버님인가 보죠.” 10살의 그의 옆에는 젊은 아버지가 액자에 걸려 있었다.
“네, 가족사진을 찍고 3년 뒤에 출가하셨어요. 지금은 거의 연락이 되지가 않죠.”
중년은 대답하지 않고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찻잔을 하나씩 들고 테이블위에 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교수님, 앉으시죠.”
그제야 중년은 뒤를 돌아 그의 옆으로 돌아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그는 맞은편에 걸려 있는 자신의 옛 모습을 바라봤다.
“어머니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버지는 늘, 미인이었다고 자랑하시곤 했죠. 그럴 때마다 감상에 젖어 한동안은 뭔가를 생각하시는지 말이 없으셨죠.”
“그렇군요.” 그의 다리에 손을 얹으며 중년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유감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게 항상 일관되게 흘러가진 않죠.” 거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강사님이 능력껏 이렇게 집도 마련하셨고 보통 야무진 분이 아닌가봅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10시를 넘겼다. 걷힌 커튼 너머로 칠흑 같은 겨울하늘에서 흰 눈이 짙게 떨어졌다. 차를 한잔 씩 더 마시고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 맛이 좋은데요.”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악수를 하고 문이 닫혔다. 화살표가 아래를 그리고 지하에서 멈췄다. 그제야 그는 시선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는 빈 잔이 두 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침묵하는 어두운 밤, 베란다 저 멀리, 가로등 조명 바로 아래로 두꺼운 눈송이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공간에서는 다시 사라지고, 사라졌던 눈은 바닥에 슬그머니 쌓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봤다.
이틀 째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공항으로 가는 기차 밖으로 설경이 보였다. 그 위로 그의 옆모습이 엷게 비쳤다. 기차가 멈추고 침낭이 불거져 나온 큰 배낭을 울러 메고, 기차 밖을 빠져나와 곳곳에서 제설작업을 하고 있는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대학들이 아직 완전히 방학을 하지 않아서인지 공항청사는 다소 한산한 모습이었다. 캐주얼차림의 외국인과 브리프케이스를 든 두 명의 비즈니스맨들이 박자를 맞춰 걸었고, 그 사이를 승무원 무리들이 비행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곳곳에 사무적으로 친절한 안내멘트가 흘러나와 넓은 청사에 울려 퍼졌다. 그 공간을 지나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가 떠날 항공사를 찾기 위해 3층 로비를 걸어 다니자, 긴 줄을 유도하는 구불구불한 차단선은 한가하게 비어 있었고, 이미 여성 한 명만이 카운터 건너로 승무원에게 뭔가를 건네주고 있었다. 그는 여성의 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짧게 삭발한 두상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마치 그녀를 위한 머리스타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평범한 키에 적절하게 붙은 살이 운동을 했는지 탄력이 있게 옷맵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발치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큰 배낭이 바닥에 놓여 있었는데, 오히려 그녀에게 더 보이시하게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두툼한 스키복의 지퍼를 끝까지 채워 목덜미를 완전히 가렸다.
티케팅이 끝났는지 카운터 너머의 직원이 그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가 앞으로 걸어가자 삭발을 한 여성이 배낭을 힘겹게 울러 메고는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그를 지나쳐갔다.
“어서 오세요.”
사무적이지만 텅 빈 청사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따스함이 묻어나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님, 한파로 인해서 비행시간이 많이 지연이 될 것 같습니다.” 예의 정중하게 사과를 하며 제설작업이 끝나는 대로 방송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로비의 라커에 배낭을 보관하고는 활주로가 내려다보이는 전면유리의 카페로 들어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길게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활주로 끝에서 제설차량이 굼벵이처럼 느릿하게 눈을 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에 덮였던 아스팔트는 이미 번들거리며 제 속살을 드러냈고, 거의 정리가 끝난 듯했다. 활주로 위에서 작업하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이 개미처럼 보였다.
그가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있으니 뒤에서 누군가가 아는 체를 했다.
“옆에 앉아도 괜찮죠?”
입 안 가득 오물거리며 대답하기도 전에, 성큼 옆에 와서 앉았다. 옆으로 돌아보니 조금 전 그의 앞에서 티케팅을 하던 삭발한 여성이었다. 가까이에서 보이는 그녀의 두상이 더 작고 매력적이다, 라고 순간 그는 생각했다.
“혹시, 조금 전엡…”
“맞아요.”
그녀는 가져온 머핀을 손으로 반을 쪼개더니 투박하게 베어 물고, 김이 느릿하게 올라오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알랭 드 보통 아세요?” 대뜸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입안의 머핀을 정성들여 씹으며 시선은 그대로 창밖을 유지했다.
“작가였던가요.”
“네, 맞아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로보고는 씩 웃어보였다. 가지런한 치아가 하얗게 빛이 났다. 사회적 기준으로 봤을 때 미인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하기는 힘들지나 않을까, 할 생김새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개성이 있다, 라고 생각했다. 살짝 찢어져 올라간 눈매와 낮은 콧대와 두툼한 입술이 동양과 남미의 혼혈인 정도로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잠시 동안 넋을 놓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쪽, 내 말 듣고 있는 거죠?” 그녀는 손을 한차례 좌우로 그의 눈앞에서 저어보이며 말했다.
“그럼요.” 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 작가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라는 타이틀을 한 책이 있죠. 작가가 공항에 일주일동안 소속되어 공항청사 곳곳을 둘러보며 에세이를 쓰게 되는 거죠.” 라고 말하며 우유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공항청사 밖을 벗어나지 않는 거죠. 엇비슷한 헐리웃영화를 모티프로 한 듯한데, 그거야 모르죠. 아무튼, 작가가 청사 옆 호텔을 묵으면서 청사 곳곳을 일주일 동안, 물론 똥오줌은 자유분방하게 싸면서, 직원이나 승객들과 얘기하며 에세이를 쓰는 거죠. 그렇게 한 권의 책을 쓰는 거예요. 속된 말로 히드로 공항을 위해서 없는 사탕발림이나 똥꼬를 빨아준다던지, 하는 건 안 해도 된다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죠. 책 첫 부분에 이런 멘트가 있어요. 본인은 가끔 비행기가 결항되어서 공항에서 제공해주는 호텔을 제공받고는 어쩔 수 없는척하며 즉흥적인 공항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만약 외계인에게 지구를 소개한다면 문화와 문화가 처음으로 도킹하는 곳이 이곳이라서 공항을 택할 것이라고도 하죠.”
남은 반쪽의 머핀을 다시 베어 물고는 우유를 마시고 입안에서 가만히 녹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침내 이런 기회가 내게도 오게 된 거죠.” 그리고 입을 닫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는 공감을 하진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동의해주었다. 몇 분간의 정적을 깨고 면접관이라도 되는 듯 당당하게 그의 차림을 한 번 크게 훑어보고는 말했다.
“인도여행은 왜 혼자가시죠?”
그녀의 말에 그는 황당했지만 기분 나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그런 태도에 거리감이 들기보다는 호기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는 그쪽은.”
“그러네요. 그냥 말수도 적으시고 혼자 여행할 분 같지는 않아 보여서요.” 실례가 됐다면 미안하다, 라고는 했지만 진심으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몇 분이 지나 청사에서 비행재계를 알리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퍼져 나왔다.
“일어나죠.” 그녀가 배낭을 메고 먼저 일어났다.
그들은 차례대로 수하물을 맡기고 티케팅을 했다. 역시나 기내는 공항청사만큼이나 한가했다. 자리가 찬 곳보다 빈자리가 더 많았다. 그 사이로 그녀의 삭발한 뒷모습이 저 멀리 반쯤 보였다. 마음 편하게 벌써 잠이 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근처로 자리를 잡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괜히 머쓱했다. 간간이 나란히 앉은 여행자들이 보이긴 했지만 거의 혼자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유석이 남아서 옮긴 건지, 아니면 그처럼 혼자서 여행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안전벨트와 기타 안전에 관한 승무원의 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그 누구도 말을 하는 이는 없었다. 기다림에 지쳤는지 기분 좋은 적막감에 비행기가, 한때는 인류 최대의 난제였을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올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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